90년도 일본 애니분석 - (5) 강철천사 쿠루미

 '신세기 에반게리온' 방영을 기점으로, 1990년도 후반기의 애니메이션계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서, 하나는 지금부터 말씀드릴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의 등장이며, 또 하나는 다음 번에 언급하게 될 '18금 게임 계열 애니메이션'의 등장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변화는 1990년도 초반까지 애니메이션계에서 통용되던 상식들을 하나씩 부수어 나갔으며, 이후에 방영된 대부분의 작품들에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작품이 바로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강철천사 쿠루미'입니다.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변 지식이 필요합니다. '동인'의 의미에 대해서 말이지요. '동인(同人)'이란, 원래 취미나 경향이 유사한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파생되어서 그런 사람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동인지' 혹은 '동인게임'이란 것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것들이 거래되는 이른바 '코미케(Comic Market)'가 1975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도에 들어서면 메이져급인 출판만화 시장을 넘볼 정도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1990년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계에 도입되기 시작한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제작비용과 기간, 필요인력이 크게 줄어들면서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이 OVA가 아닌, 공중파를 탈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동인 시장에서 히트를 기록한 작가들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만, 기존의 출판 만화 시장과는 전혀 환경이 다른 동인 시장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들과는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을 만들 리는 없습니다. 결국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은 '동인지'의 특성을 대부분 계승하는 형태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발간된 수많은 '동인지'들을 일괄적으로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만,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작화의 화려함

동인지도 상품이기 때문에 일단 팔려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인지를 구매하는 기준은 대부분 작화 수준에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지 작가들은 이런 점을 감안해서 매우 독특한 작화 기법을 개발해왔고, 이런 기법들은 빠른 시간 내에 작화를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기존의 기법들과는 달리 작화 시간에 관계하지 않고 화려하고 섬세한 작화를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은 일반적인 작화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보여주거나 일반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독특한 작화를 선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2. 노출도의 증대

마찬가지로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동인지에 있어서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노출이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동인지는 비정규 간행물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매우 크다는 것도 노출이 심해지는 한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출의 증가는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오면서 다소 순화되기는 했습니다만, 직접적인 성적 묘사를 자제하는 대신에 상황적 연출이나 은유, 의도적인 삭제 등을 통해서 오히려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3. 스토리상의 패러디와 전개의 무내용성

대부분의 동인지는 판매를 위해서 유명 작품의 이름이나 캐릭터를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스토리 작가가 아닌 이상 이들이 전개하는 스토리라인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대부분의 동인지는 유명작품을 패러디하거나, 가볍게 보고는 웃을 수 있는 코믹 계열의 스토리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런 영향을 받은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은 상황의 연출에 있어서는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매우 뛰어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의 전개나 개연성 등은 다소 부족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특성들이 '강철천사 쿠루미'에서도 보여집니다만, 이것들만이 '강철천사 쿠루미'의 전부는 아닙니다. 후속편도 만들어지는 등 이 작품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이유 중에 하나는 러닝타임이 짧다는 것입니다. 짧은 러닝타임으로 스토리의 허접함을 커버하고 또, 높은 작화수준에 걸맞는 제작시간을 벌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잔머리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액션신이 많은 것도 주목해야 할 점인데, 액션씬은 일반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스토리의 허점과 짧은 러닝타임의 단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앗! 여신님'을 참고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는데, '우연한 만남 - 차례차례 등장하는 자매들'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일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초기작답지 않게 장르의 단점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제작진이 가닥을 잡은 것이 성공의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이 작품의 방영을 시작으로 '엑셀 사가('99)', '러브 히나('00)', 'Hand Maid 메이('00)', '반드레드('00)'가 방영됨으로서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2000년도에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이 주류로 등장하는 데에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울러 '원작 없는 애니메이션'으로서, 스토리의 빈약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by 지는벚꽃 | 2006/02/23 11:50 | 한일 유희문화 분석 | 트랙백
90년도 일본 애니분석 - (4) 카드캡터 사쿠라

 199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TV 에니메이션계에 일어났던 변화 중에 흥미로운 것은 '리얼 로봇물'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90년 중반에 건담 시리즈가 V('93), G('94), W('95), X('96)로 진행되었습니다만 대부분 리얼 로봇 매니아들에게 외면받았으며, 상업적으로도 Wing이 여성팬들의 힘을 얻어서 성공한 것을 제하면 그다지 좋은 실적을 올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마크로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크로스7('94)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실패한 공통적인 원인은 '리얼 로봇물'의 본질을 저버린 것에 있으며, 주 시청자였던 청소년과 성인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던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80년대에 거의 매년마다 TV 애니메이션에서 크게 성공했던 '소년만화 계열'도 90년도에는 그다지 히트작을 많이 내놓지 못했는데, 드래곤볼Z('89)에서 시작해서 유유백서('92), 슬램덩크('93), 드래곤볼GT('96), 명탐정 코난('96), 떠돌이 켄신('96), 헌터X헌터('99), 원피스('99)로 이어지는 명맥만을 유지했을 뿐이며, 이런 성적의 원인은 이런 작품들이 청소년에게는 어필할 수 있어도 성인의 취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변신-마법소녀물'은 90년대에도 여전히 건재했습니다만, 이런 작품들을 일반적인 청소년이나 성인이 보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90년도 중반에 청소년이나 성인들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코믹물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무책임함장 테일러('93), 기동전함 나데시코('96), 로스트 유니버스('98)로 이어지는 우주 코믹물, 마법진 구루구루('94), 슬레이어즈('95), 엘프를 노리는 녀석들('96)로 이어지는 환타지 코믹물, 그와 그녀의 사정('98), GTO('99)와 같은 학원 코믹물이 유명세를 타게 된 데에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코믹물에게만 청소년층과 성인층을 내주고 다른 장르들이 구경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소녀전사 세라문에서 한걸음 더 발전한, 이른바 '3세대 변신-마법소녀물'인 카드캡터 사쿠라('98)를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놀이패 갈무리꾼 벛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작자인 'CLAMP'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CLAMP'는 87년에 동인작가그룹으로 시작해서 89년에 프로로 전향한 작가집단입니다. 87년에 시작할 때는 11명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오오카와 나나세, 모코나 아파파, 네코미 미쿠, 이가라시 사쯔키만 남았습니다. 모두 도쿄대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오오카와 나나세는 국문과의 수재로 그녀의 뛰어난 스토리 구성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이 있을 정도입니다. 나나세의 스토리와 모코나의 필체로 구성되는 CLAMP의 작품들은 매우 독특한 세계관이 특징적인데, 개인주의적이고 윤리나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과 스토리의 설정은 그녀들이 독신인 점에 기인한 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서 만화를 그리는 삶을 선택한 점도 고려해봐야 겠지요. 아무튼 '성전'과 같이 대중적이기보다는 매니악한 작품을 내놓던 이들이 처음으로 대중성에 도전한 것이 '마법기사 레이아스('94, TV)'입니다. 문하생이 그렸을꺼라는 열성팬의 악평까지 들을 정도로 'CLAMP'답지 않은 이 작품은, 물론 그래도 일반 작품들과는 비교되는 독특함이 있습니다만, 상당히 대중적인 취향에 맞추었기 때문에 게임으로까지 제작되는 등의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흥행에 도전한 작품이 '카드캡터 사쿠라'라고 생각하시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카드캡터 사쿠라가 '3세대 변신-마법소녀물'이라 불리는 이유는 '변신'을 '코스프레'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코스프레'란 '코스츔 플레이'의 준말로서, 특이한 의상을 입고서 즐기는 파티 등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유사하게 분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변신소녀물에서 '유치함'을 제거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비현실적이고 아동틱한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지요. 물론 '카드'를 이용한 다양한 마법을 선보인 것과 같이 카드캡터 사쿠라가 다른 변신-마법소녀물과 구별되는 특징은 많습니다만, 이 '코스프레'가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이러한 '코스프레'를 '토모요'라는 케릭터의 특성과 절묘하게 결합시켜서 완벽하게 개연성을 확보하는 설정은 대단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LAMP가 이 작품에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외부 원화 감독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CLAMP의 특이한 필치는 일반적인 셀 애니메이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때에 다소의 거부감이 든다는군요. 그래서 외부 원화 감독을 둔 것이 캐릭터의 귀여움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어서 애니메이션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마져 캐릭터 상품을 슬쩍 보기만 해도 사간다는 무서운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편 CLAMP가 이 작품을 어느 연령대를 위해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케로짱에게 맡겨줘!' 코너입니다. 저연령의 시청자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초고속의 스피드와 알아듣기 힘든 오사카 사투리가 특징인 이 코너는 각 화에 등장한 '코스프레'의 설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동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습니다.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애증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도 이 작품이 저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 아님을 보여주는데, 특히 리카와 테라다 선생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사랑, 친척 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도 반대하다가 그녀가 죽자 딸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 어지간한 멜로 드라마의 한편같은 설정이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이런 구성이야말로 CLAMP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방영초기부터 돌풍을 일으키며, 국내에서도 '여신진리교'를 무너뜨리고 '로리교'를 탄생시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는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하는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사쿠라'라는 캐릭터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향은 '시스터 프린세스('01)' 등으로 계승되는 '로리지온'으로 확대되어 '부탁해요, 선생님('02)'의 '미즈호'로 대변되는 '누님연방'의 공방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90년도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18금 게임 계열이나 동인 계열 애니메이션의 교두보적 역할도 수행하게 되어서 'To Heart('99)', '하급생('99)', '강철천사 쿠루미('99)', '엑셀사가('99)'와 같은 작품들의 등장과 성공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한편 스스로도 놀랄만한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서 CLAMP가 '기동천사 엔젤릭 레이어('01)', '쵸비츠('02)'와 같은 대중성있는 작품으로 방향을 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by 지는벚꽃 | 2006/02/23 03:48 | 한일 유희문화 분석 | 트랙백
90년도 일본 애니분석 - (3) 신세기 에반게리온

 누군가가 저에게 1990년도를 대표할만한 작품을 꼽으라면 전반기에서 '미소녀전사 세라문'을, 후반기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들겁니다. '세라문'은 200화라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고화질의 대작 TV 애니메이션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공로를 인정해서이고, '에반게리온'은 주제나 작품 진행방식, 그리고 수익 모델에 이르기까지 1990년도 후반기 작품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 중에 하나만 꼽으라면 '에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세라문'이 이후의 작품들에 영향을 준 것에 그쳤다면, '에바'는 이후의 작품들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에바'를 기준으로, 이전의 작품들은 아동 혹은 전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른바 '~물'로 대표되는 장르의 범주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이후의 작품들 중에서는 청소년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여러장르를 혼합하거나 부분부분 빌리는 형태를 띄는 것들이 급증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두고 '포스트 에바'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이런 판이한 변화를 만들어낸 '에바'라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품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한 법입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배경을 이루는 엄청난 설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나 서적을 통해 질리도록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저로서는 더이상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을 소모적인 논쟁으로 몰고가는 일일 뿐더러 이 글의 취지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설정이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는가 따위의 세세한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어떤 요소가 대중들에게 어필하였고 어떻게 그런 요소들이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에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를 조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미 고교시절부터 작품을 제작했던 골수 '오타쿠'로서, 'TV판 마크로스'의 제작에 참여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여서 '건버스터 - 톱을 노려라!'를 시작으로 감독 일을 맡게 됩니다. 그 이후에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총감독을 맡았고, '에바'에서도 총감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건버스터'에서도 우주 SF물에 학원 연애물, 순정 스포츠물을 섞고, 패러디로 양념한 바 있습니다만, '나디아'에서 겉으로는 '해저 2만리'라고 우기면서도 '천공의 섬 라퓨타'를 표절에 가까울 정도로 패러디한 점은 거의 시청자 기만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패러디'를 기반으로 하는 능수능란한 속임수의 마술사가 바로 '안노 히데아키'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그가 '에바'에서 '패러디'를 사용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7, 80년대의 열혈 로봇물의 설정과 스토리를 기반으로 학원물, 사이코 드라마를 적절하게 혼합하면서도, 중간중간마다 이러한 원래의 장르의 틀을 부정하는 그의 독특한 연출은 당시의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작품의 다양한 미스테리가 미해결 상태로 끝났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는 감독인 안노가 사고로 인해 25, 26화를 제작할 때에 병원에서 지시만 해야 했던 점과, 초반의 엄청난 제작비 투입으로 인한 제작비 부족에 기인한 면이 많기는 합니다만, 제작진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끝까지 종잡을 수 없었던 스토리와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이 작품을 대히트작으로 만든 원동력임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미결말의 미스테리는 치밀하고도 대담한 속임수를 펼치는 안노 감독의 의도적인 기획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광범위한 설정을 구성함에 있어서 사해문서와 같은 민감한 이슈를 도입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사람들의 입을 빌려 작품을 보게 만드는 고전적인 수법입니다만, 사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첫방영 당시 2% 남짓의 시청률을 보인 이 작품이 대히트작이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설정과 스토리의 기묘함 만으로 승부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안노 감독은 이미 아마추어 시절부터 화려한 미사일 유도씬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오타쿠 출신이라고 해도 원화부터 시작해서 작화감독, 총감독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과정을 밟은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화면의 연출을 놓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겠지요. 그의 화면 미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2화의 전투씬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극도의 클로즈 업을 통한 극적인 움직임 표현이고, 또 하나는 정적인 화면을 통한 감정이입이며, 마지막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자막 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기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 외에도 셀 애니메이션을 탈피한 기법들도 선보이고 있으며, 아스카와 신지의 합동 공격 씬에서처럼 음악을 이용한 연출도 보여줍니다만, 앞서의 기법들에 비해서 이러한 것들이 '에바'를 상징하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다양한 화면 연출이 '에바'를 히트하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에바'의 성공을 더욱 더 돋보이게 만든 것은 제한적인 연령층의 공략입니다. 애시당초 아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작품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로 이어지는 청년층 이상을 타겟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트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7, 80년도부터 애니메이션을 보았던 독신 직장인층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게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오타쿠'출신들로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은 생활용품에서 한정판 소프트에 이르기까지 싸그리 갖추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입니다. 이들의 주머니를 공략함으로서 '에바'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의 히트만이 아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출판만화 - 애니메이션 - 완구류 및 기타 상품으로 이어지는 상업적 전략을 애니메이션 - 출판만화 및 게임 소프트 - 관련 상품 전략으로 재구성하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이는 1990년대 후반기 애니메이션의 상업적 모델로 떠오르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아야나미 레이'라는 캐릭터인데, 이 이전까지는 주역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cool'한 캐릭터가 대히트를 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나디아'형 캐러나 '베르단디'형 캐러에 식상한 대중들의 반발감에 의한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해석은 이후에 '기동전함 나데시코'의 '호시노 루리', 'To Heart'의 '쿠르스가와 세리카', 시스터 프린세스의 '치카게'로 이어지는 캐릭터들의 히트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작품 자체의 히트와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성과를 거둔 '에반게리온'은 이후의 작품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장르파괴'와 '패러디'의 일반화인데, 1996년에 방영된 '기동전함 나데시코'가 가증스럽게도 '에바'마저 패러디하는 것을 보셨다면 충분히 납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계속되어 온 심각한 소재 고갈 현상과 1990년도에 급속하게 성장한 동인 시장에서 발굴된 인력의 유입으로 더욱 가속화되어서 1990년도 말과 2000년도 초에 동인계열 애니메이션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또 한 가지의 영향은 '미지근한 종결' 뒤에 극장판으로 마무리하는 애니메이션이 늘어나게 된 점으로서, 1998년에 방영된 '카드켑터 사쿠라'가 TV판이 아닌 두번째 극장판에서 스토리를 마무리한 것을 보셨다면 납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이후에 극장판 대신 OVA를 추가로 발매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2001년에 방영된 '하나우쿄 메이드대'와 '코코로 도서관'이 추가편을 OVA로 발매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by 지는벚꽃 | 2006/02/23 03:32 | 한일 유희문화 분석 | 트랙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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